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나미 지로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일본 [[오이타 현]] 다카다 시에서 태어난 미나미 지로는 1884년 7월에 숙부였던 [[미야자키 요이치]]를 따라 상경하여 [[도쿄시|도쿄]]에서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학업 성적이 우수했기에 바로 고등과로 올라갔다. 1889년에 중학 재학시 품행 불량을 이유로 교장에게 1개월 정학을 받자 여기에 반발하여 [[학교]]를 그만 둔 후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갔다가 1892년에 [[일본육군사관학교]] 6기로 입학했다. 1903년 일본육군대학 17기로 졸업했고 1904년 [[러일전쟁]]에 참전했으며 러일전쟁 후 소좌로 [[승진]]해 제13사단 [[참모]]로 일한 미나미 지로는 [[기병]] 13연대장을 거쳐 대좌로 승진 후 [[유럽]] 순방을 마치고 1919년에 소장이 되어 지나주둔군 [[사령관]]이 되었다. 1930년 육군대장이 되었고 제2차 와카츠키 [[내각]]에서 육군대신으로 발탁되었을 때 [[만주사변]]이 일어났지만 그는 [[관동군]]의 행동을 사실상 묵인했으며 육군상으로 재임 중일 때 [[부하]]였던 군사과장인 나가다 테츠잔(永田鐵山)이 [[국가]] 총동원령을 제안하기도 했다. 1934년에는 관동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200px-Minami_Jiro.jpg]] 미나미 지로는 1936년에 제6대 조선총독인 [[우가키 가즈시게]]의 후임으로 제7대 [[조선총독]]에 취임했는데 이후 역대 조선총독 가운데 가장 강경하고 무시무시한 [[통치]]를 일삼았으며 [[조선]]에 황국 신민화 [[정책]]을 실시하고 지원병 제도를 제창하여 무고한 조선 [[청년]]들을 [[전쟁]]터로 내몰았다.[* 미나미 지로가 제창했던 지원병 제도는 제8대 조선총독인 [[고이소 구니아키]]를 거쳐 [[학병]] 제도로 강화되었다.] 이것도 모자라 [[한국어|조선어]] 사용과 [[한국사|조선사]] 교육을 금지하며 [[일본어]] 사용을 의무화시켰고 1936년 [[일장기 말소사건]]을 구실삼아 <[[동아일보]]>와 <[[조선중앙일보]]>를 정간시키기도 했다. 1940년에는 모든 [[조선인]]들을 대상으로 [[창씨개명]]을 시행하여 이를 거부하는 조선인에게는 온갖 제재를 내리는 방침도 세웠다. 그렇게 미나미 지로가 조선총독으로 재직한 약 6년간 [[내선일체]]를 강조하면서 [[한국인]]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려는 [[민족말살정책]]을 시행했다. [[파일:미나미 지로.jpg|width=400]] 1942년 조선총독에서 물러난 뒤에는 본국인 일본으로 건너가 추밀원 고문이 되었고 [[귀족원(일본)|귀족원]] 의원, 대일본정치회 [[총재]]를 역임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